실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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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미도 사건은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정권이 창설한 684부대의 훈련과 관련된 사건이다. 684부대는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작전 취소 후 1971년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교관 및 기간병을 살해하고 탈출했다. 이들은 청와대로 향하려다 서울 시내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자폭했으며,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했다.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고, 2003년 영화 '실미도'로 제작되기도 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사망한 4명의 유골 발굴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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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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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사건명 | 실미도 사건 |
한글 표기 | 실미도 사건 |
한자 표기 | 實尾島事件 |
가타카나 표기 | シルミド サコン |
로마자 표기 | Silmido Sageon |
사건 개요 | |
발생 시기 | 1971년 8월 23일 |
발생 장소 | 실미도 및 서울 |
원인 | 북파 공작원들의 열악한 처우 및 임무 불이행 훈련 과정에서의 가혹 행위 |
관련 단체 | 대한민국 공군 2325부대 |
주요 관련자 | 북파 공작원 31명 |
결과 | 북파 공작원 전원 사망 또는 사형 |
배경 | |
창설 배경 | 박정희 정권의 대북 보복 정책 |
훈련 목적 | 김일성 암살 등 대북 침투 공작 수행 |
훈련 내용 | 특수 훈련 및 무자비한 가혹 행위 |
사건 전개 | |
무장 탈출 |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기간병을 살해하고 무장 탈출 |
서울 진입 | 인천에서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함 |
교전 |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 노량진에서 버스 폭파 후 집단 자폭 |
최종 결과 |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 후 사형 |
논란 및 의혹 | |
은폐 시도 | 군 당국의 사건 은폐 및 축소 시도 |
진실 규명 | 2000년대 이후 진실 규명 요구 증가 및 관련 재판 진행 |
국가 폭력 |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 사례로 비판 |
문화적 영향 | |
영화 | 실미도 (2003년) |
기타 | 사회적 반향 및 국가 폭력에 대한 성찰 |
참고 자료 | |
관련 보도 | “역사에서 지워진” 대북 특수부대 (NHK 뉴스) |
2. 배경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1명이 대통령 박정희 암살을 목표로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1·21 사태가 발생했다.[6]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생포된 공작원 김신조의 진술로 암살 목적이 확인되자 박정희 정권은 격분하여 보복을 계획했다.
정부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향토예비군 창설 등 군비 증강에 나섰고,[8]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교련 교육 실시, 인왕산·북악산 등 통행금지 조치를 시행했다.[9]
초기에는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검토했으나, 직후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과 베트남 전쟁에 개입 중이던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은 어려워졌다.[1] 이에 박정희 정권은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하는 비밀 특수부대 창설로 방향을 바꾸었다.
1968년 4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주도로 인천 앞바다의 실미도에 북파 공작 부대인 684 부대가 창설되었다.[10] 부대 명칭은 창설 연월인 '68년 4월'에서 따왔으며, 1·21 사태 당시 남파된 북한 공작원 수와 동일하게 31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1] 대원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북한 침투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고 남북 간 대화가 시작되면서[1] 김일성 암살 작전의 실행은 불투명해졌고 계획은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더욱이 부대 창설을 주도했던 김형욱이 1969년 10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경질되면서[11] 684부대는 지휘 공백과 무관심 속에 사실상 방치되었다. 작전 목표는 사라졌지만 기밀 유지를 명목으로 부대원들의 사회 복귀는 차단되었고, 열악한 처우 속에서 강도 높은 훈련만 지속되면서 부대원들의 불만은 극도로 고조되었다.[12]
2. 1.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6]휴전선을 넘은 이들 31명은 21일 밤 9시 30분경 서울 청운동 세검정 터 부근, 청와대 앞 500m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창의문 근처에서 경찰의 불시 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사건 이후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졌고, 군경 합동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무장 공비 31명 중 29명은 사살되었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으며, 김신조 소위 1명만이 생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전 및 수류탄 투척 등으로 군인, 경찰,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7] 생포된 김신조는 습격 목표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격분한 박정희는 사건에 대한 보복 조치를 지시했다.
박정희 정권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통한 보복을 검토했다. 하지만 사건 직후인 1월 23일에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베트남 전쟁을 수행 중이던 미국의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미국의 지원을 얻기 어렵게 되자 박정희 정권도 북한 공격 계획을 단념해야 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은 비밀리에 특수부대를 이용한 보복 작전을 추진했다. 북한 주석궁 폭파와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1968년 4월 공군 산하에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창설 연월인 '68년 4월'을 따 '''684부대'''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대원은 주로 민간인 중에서 모집되었는데, 정부는 처음부터 지킬 의사가 없는 조건을 제시하며 이들을 유인했다.[1] 북한 공작원과 같은 수인 31명으로 구성된 684부대는 인천 앞바다의 실미도에 격리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북한 침투 및 김일성 암살 명령을 기다리게 되었다.[1]
2. 2. 국가안보 우선주의와 684부대 창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1·21 사태가 발생했다.[6] 이 과정에서 공비 29명이 사살되고 1명이 도주, 1명(김신조)이 생포되었으며, 교전 중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7] 생포된 김신조는 대통령 암살이 남파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며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를 창설하였고,[8]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의무화되었다.[9] 또한 대통령 경호 강화를 이유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9]
박정희 정권은 1·21 사태에 대한 보복 조치를 계획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군사 공격을 검토했으나, 직후 발생한 푸에르토블호 사건으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확인되자[1] 미국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북진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수정했다. 대신 게릴라를 이용한 북한 주석궁 폭파와 김일성 암살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는 1968년 4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주도로 인천 인근의 무인도인 실미도에 북파 목적의 특수부대를 창설했다.[10] 부대는 창설 연월인 '68년 4월'을 따 '''684 부대'''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렸으며,[1] 총원은 1·21 사태 때 넘어온 북한 공작원 수와 동일한 31명으로 구성되었다. 부대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정부는 지키기 어려운 조건으로 이들을 모집했다.[1]
684 부대원들은 김일성 암살이라는 목표를 위해 실미도에 격리 수용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1] 그러나 데탕트로 대표되는 국제적인 긴장 완화 분위기와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서 북한 침투 및 암살 작전 계획은 불확실해지고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대 창설을 주도했던 김형욱이 3선 개헌 추진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1969년 10월 20일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면서[11] 684부대는 사실상 방치 상태에 놓였다. 부대원들의 원 소속은 공군이었으나 실제 관리는 중앙정보부가 담당했는데, 김형욱 경질 이후 중앙정보부의 무관심 속에 부대의 존재 자체가 잊혀 갔고 관리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혹한 훈련은 계속되었으나 부실한 부식과 처우 등 비인간적인 대우가 이어졌고,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부대원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12]
3. 사건 전개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데탕트 정책의 일환으로 1970년 7월 주한미군 감축을 발표했다. 이후 1971년 4월 북한의 통일 회담 제의, 9월 대한적십자사와 조선적십자회 간 예비회담 시작,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발표 및 8월 적십자 본회담 시작 등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1971년에 684부대의 북파 계획을 철회하고 부대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기밀 유지를 이유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목적을 상실한 고된 훈련은 계속되었다. 사실상 섬에 유폐된 대원들은 열악한 처우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1971년 8월 23일, 684부대원 24명[2]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이들은 인천에 상륙하여 버스를 탈취한 뒤,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처우 개선 등을 호소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1]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경찰과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였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사옥 앞에서 벌어진 마지막 교전 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 사건으로 부대원 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했다. 생존한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72년 총살형으로 형이 집행되었다.[1] 이들의 정확한 처형 장소와 유해 매장지는 기밀로 분류되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울 근교의 한 사격장에서 처형 후 매장되었다는 설이 있다.[1]
3. 1. 탈출과 서울 진입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경, 실미도의 684부대원 23명은 교관 및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했다.[13][2] 이들은 같은 날 12시 20분경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하여, 현대 R-192 시내버스를 탈취했다. 부대원들의 목적은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열악한 처우 개선 등을 호소하는 것이었다.[1]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중 인천 시내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버스 타이어가 터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부대원들은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태화상운 소속의 신진 FB100L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하여 서울로 향했다.[13]
오후 2시 15분경, 버스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당시 영등포구 대방동)에 위치한 유한양행 본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군·경찰과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졌고, 교전 끝에 부대원 대부분은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14][1]
이 사건으로 부대원 20명이 사망했으며, 현장에서 생존한 4명은 체포되어 군사재판(군법회의)에 넘겨졌다.[1] 이들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총살형) 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14][1] 정확한 처형 장소는 기밀에 부쳐져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울 근교의 한 사격장에서 처형된 뒤 유골도 그 근처에 매장되었다는 설이 있다.[1]
3. 2. 정부의 은폐와 왜곡
사건 발생 초기 정부는 북한 무장공비의 침입이라 발표하여 김포국제공항 폐쇄와 한강교 차단 등과 맞물려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켰다. 이후 군 특수범으로 정정 발표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군 장성 출신 야당 국회의원 이세규가 특수부대원의 난동이라고 진상을 폭로하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도 군 특수범이 아닌 특수 부대 요원이라고 실토하는 등 정부는 여러 차례 발표 내용을 번복했다.[14]정치평론가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실체를 은폐하려 했으며, 진상을 폭로한 신민당 소속 이세규 의원에게 보복성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14] 또한 같은 당의 김한수 의원은 시국 강연회에서 군 특수범들의 소속 부대를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실미도 사건 부대 이름을 공표해 반공법 등을 어겼다'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고 주장한다.[16][14]
그러나 이들 의원들의 체포가 '실미도 난동사건' 폭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세규와 김한수[17][18]를 포함한 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1972년 유신 특별선언 발표 이후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김옥두 의원은 회고록에서 수사관들이 김대중 관련 진술이나 신민당의 정치자금 출처 등을 주로 추궁했다고 밝혔다.[19] 실제로 이때 유신 선언에 반대하다 체포된 의원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의원과 같은 지역 출신이거나 그의 측근들이었다. 여기에는 나석호, 김경인, 김상현, 김녹영, 김옥두,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조연하, 이종남 등이 포함된다.[15]
4. 사건 이후
이 사건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하에서 오랫동안 그 진상이 알려지지 않고 은폐되어 왔다.[1] 그러나 민주화 이후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4. 1. 진실 규명 노력
오랫동안 잊혀가던 이 사건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다룬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영화 실미도가 개봉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이 사건은 과거 군사정권 하에서는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으나, 민주화 이후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영화로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1] 2004년 2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에 집단으로 행방불명 처리되었던 청년 7명이 실제로는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그러나 영화 내용 중 일부 각색된 부분, 특히 684부대원들이 사형수나 무기징역수 등 범죄자 출신으로 묘사된 점에 대해 유족들은 "명예를 훼손한다"며 상영 금지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 당국도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1] 2005년에는 국방부가 사건 발생 34년 만에 684부대원 유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망 통지서를 전달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21년 5월, 관련 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직속 독립 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했다.[3] 2023년 5월에는 국방부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울시립 승화원' 묘역 내에서 사형된 4명 대원의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4]
4. 2. 기간병 유족의 보상 문제
실미도 기간병 유족 11명은 2005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특수임무 수행 중 순직한 기간요원에 대한 정부 보상을 요구하며 2000만원~1억원 상당의 국가 보상을 신청했다. 그러나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는 "기간병은 북파공작 임무를 부여받지 않아 보상 대상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 유족회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패소했다.[20]5. 684부대 예산 횡령 의혹
684 부대는 중앙정보부가 창설하고 관리했지만, 부대를 창설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1969년 10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경질된 이후[11] 부대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이러한 관리 부실 속에서 중앙정보부가 684부대 운영을 위해 책정한 예산이 대규모로 횡령된 정황이 포착되었다.[21] 그러나 이 횡령 의혹은 공군 수사당국의 축소 수사 등으로 인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결국 유야무야되었다.[21]
6. 미디어
실미도 사건은 소설, 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잊혔던 사건의 진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주요 도서 및 다큐멘터리는 다음과 같다.
- 도서
- 성내강신, 《실미도 「실미도 사건」의 진실》, 보섬사, 2004년. ISBN 4796640738
- 황상규, 《실미도(シルミド) -생존자 김방일 전 소대장의 증언-》, 소프트뱅크퍼블리싱, 2004년. ISBN 4-7973-2758-8
- 다큐멘터리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2회 - 실미도 특수부대
6. 1. 영화
잊혀가던 실미도 사건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다룬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영화 실미도가 개봉되기 전, 실미도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쿠데타>가 기획되었으나 제작비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제작이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 PD 출신 김종학의 영화 감독 데뷔가 좌절되기도 했다.
영화 실미도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개봉 이후인 2004년 2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 집단 행방불명 처리되었던 청년 7명이 실제로는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6. 2. 소설
잊혀가던 실미도 사건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이후 2003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백동호, 《실미도》, 정은숙 역, 환동사, 2004년. ISBN 4-344-00616-X
6. 3. 다큐멘터리
7. 평가 및 논란
이 사건으로 김포국제공항이 폐쇄되고 한강교가 차단되면서 시민들은 큰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초기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발표했으나, 이후 군 특수범의 소행이라고 정정 발표하면서 혼란을 키웠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자 군 장성 출신이었던 이세규 의원은 이 사건이 특수부대원의 난동이라고 진상을 폭로했고,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도 군 특수범이 아닌 특수 부대 요원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며 정부 발표가 여러 차례 번복되었다.[14]
정치평론가 강준만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축소하고 부대의 실체를 은폐하려 했으며, 진상을 폭로한 신민당 이세규 의원에게 고문을 가하는 등 보복했다고 주장한다.[14] 또한, 신민당 김한수 의원은 시국 강연회에서 군 특수범들의 소속 부대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고 한다.[16] 그는 '실미도 사건 부대 이름을 공표해 반공법 등을 어겼다'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고 주장했다.[14]
그러나 이들 의원이 '실미도 난동사건' 때문에 직접적으로 체포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시각도 있다. 이세규와 김한수[17][18]를 포함한 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1972년 유신 특별선언 이후 반독재 및 반유신 투쟁을 벌이다가 옥고를 치렀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김옥두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수사관들이 실미도 사건보다는 신민당 의원들의 정치자금 출처나 김대중에 대한 진술을 주로 요구했다고 밝혔다.[19]
공교롭게도 당시 유신 선언에 반대하다 체포된 의원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의원과 같은 지역 출신이거나 가까운 동료들이었다. 여기에는 나석호, 김경인, 김상현, 김녹영, 김옥두,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조연하, 이종남 등이 포함된다.[15]
참조
[1]
웹사이트
“歴史から消された” 対北朝鮮特殊部隊
https://www3.nhk.or.[...]
日本放送協会
2021-12-16
[2]
text
[3]
웹사이트
韓国、シルミド事件の再調査着手へ 50年目の真相究明
https://www.nikkei.c[...]
日経新聞
2021-05-25
[4]
뉴스
韓国軍、「シルミド事件」で死刑の4人、遺体を発掘…埋葬から51年
https://www.afpbb.co[...]
2023-05-08
[5]
뉴스
'실미도 공작원' 유해 안치됐지만…풀리지 않는 유족의 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7-08-23
[6]
웹사이트
1·21사태 [一二一事態]
https://terms.naver.[...]
[7]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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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경비경찰의 특성 [警備警察- 特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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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기, 박억종, 안성률, 남재성, 이상열, 임준태, 조성택, 최미옥, 한형서
201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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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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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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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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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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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사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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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 <김대중 죽이기> 쓴 강준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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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2
밝은세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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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투쟁’ 3년 옥고 … 국회의원 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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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기개 실천한 참군인/24일 타계한 이세규장군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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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은 물고문, 김옥두는 통닭구이…“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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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서 온 형, 손바닥 굳은살도 없더라” 유족이 본 684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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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실미도 50년]"공작원 4명 사형뒤 대방동 묻어"···진실 다시 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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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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